이재명 성남시장 가난한 노동자에서 시장까지 일대기

Posted by 토이맨
2017. 11. 22. 12:11 정치 스토리

이재명 성남시장 가난한 노동자에서 시장까지 일대기



1964년 경상북도,안동 가난한 가정의 7남매중 5째로 태어난 이재명...초등학교 졸업후 정규교육을 마치지 못했다.1976년 경기도 성남으로 이주하며 상대원공단의 노동자가 됩니다. 당시 13살,어린나이에 반지하 단칸방에서 전전하며 동마고무,아주냉동,대양실업, 오리엔트 등 여러 공장을 전전한다.



공장에서의 구타, 두번의 자살시도 실패하며 죽기살기로 공부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공장일을 병행하며 고입,대입검정고시를 합격하며 한을 풀겠다는 듯 일과 공부에 매진한다1981년 프레스기기에 팔이끼며 장애 6급 판정을 받아 군면제가 된다.아직도 후각능력 저하와 그의 팔이 휘어있는 이유기도 하다.



공부로 한풀이라도 하겠다는듯 그는,1982년 중앙대 법학과 장학생으로 입학,1986년 졸업과 함께 사법시험에 합격한다.연수원에서 "정기승 대법원장 인준 반대 서명운동" 성명서를 이재명이 썼다고 한다.다행히 잘리진 않았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사법연수원 시절 진로를 바꾸게 만든 한 강의를 듣게 된다. 당시 강의를 들었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법연수원 시절 꽤 이름 난 변호사 한분이 특별 강사로 초청되어 열띈 강연을 펼쳤다. 그는 부산에서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의 체험담을 젊은 후배들에게 들려주었다...열정과 진심이 묻어나는 뜨거운 강연이었다. 그의 이름은 노무현이었다.강연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가슴속에서 또 하나의 결심이 다져지고 있었다.나도 저분처럼 인권변호사가 되리라"



그가 출판한 책에서 노무현과의 만남을 이렇게 기록했다. 검사시보로 법조인의 생활을 시작했지만 군사정권 독재성을 이유로 성남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다.변호사 개업후 3살 연하인 김혜경씨와 결혼, 이천,광주시의 노동상담소장으로 활동하며 시국 노동 사건 변론등을 맡게 된다.





성남참여연대를 결성하며 다수의 문제에 제동을 거는데 앞장섰는데, 2002년 파크뷰 특혜 분양에 추적 60분에 폭로하는 과정에서 검사사칭전화 방조죄로 처벌 받게 된다.이후 성남시립병원설립추진위원회 공동대표로 성남시 발전에 노력하는 변호사로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된다. 이후 2004년 음주운전으로 150만원의 벌금을 내기도 했다.이때의 벌금으로 지지율의 큰 타격을 입기도 했다..



2005년 열린우리당(현 더불어민주당)에 입당과 함께 성남시장에 출마,노무현 정권 심판론앞에 낙선하게 된다.2007 정동영 캠프 비서실 수석부실장, 2008년 성남시 분당구갑에 공천되지만 연속된 낙선을 겪게 된다.



지독한 도전끝에 2010년 51%라는 높은 지지율로 성남시장에 당선,전임시장의 방만한 국정운영으로 당선된지 2달만에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는데, 모라토리엄이란,채무지금 유예로 사실상 재정적 부도상황을 뜻한다. 유래없는 재정적 부도상황에 성남시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임기 3년 6개월만에 모든 빚을 청산한다.




형수 욕설 사건에 휘말린 2013년, 당당하게 도덕적인 부분은 사과하며 일단락 되었다. 이후 그의 발목을 잡는 사건중 하나가 되었다.높은 공략이행률과 모라토리엄상황에서 재정건전으로 이끌어낸 시장의 능력을 본 성남시민들은 2014년에는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이재명을 다시 선택한다.



전통적으로 새누리 지지층이 많은 성남지역에서 이재명의 재선은 흥미로운 요소였고 무엇보다 재정건전화를 지지자들은 높게 샀다. 2016년 박근혜 정부의 일방적인 지방재정 개혁 추진안에 반대하며 11일간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지방재정 개편안은 현재 진행중이다.그가 얘기하던 복지 실현을 위해 113억의 예산 확보,성남시 청년 복지 배당을 실현중에 있다.



마지막으로 이재명이 남긴말로 마무리 합니다.~^^

법은 공정해야 하고 재벌총수들도 불법을 저지르면 처벌받아야 하고, 국가는 국민에게 위임받은 권력을 소수기득권자가 아니라, 다수 국민의 행복을 위해 행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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